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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 각각의 계절 중 기억의 왈츠

by 인생은 영화처럼 2025. 3. 14.

 

 

각각의 계절 책 이미지

 

 

 

2월에 각각의 계절을 읽었다.

 

단편 모음집으로 읽는데 그리 힘들진 않다.

 

내내 그저 그랬는데 마지막, 기억의 왈츠는 마음에 남았다.

 

젊었을 때 절망 속에 살면서 그걸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던 날들.

오히려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내심 무의식중에 바랬을 날들.

 

분명 작거나 크거나 있었을 젊음의 특징아닌가.

 

 

한 때, 친했던 경서에게서 받은 편지가 남아 있어 그것을 보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어 필사를 해본다.

 

경서에게 일기 상자를 돌려보낼 때 그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담아 보내서 내게는 경서와 관련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경서의 편지가 기억난 건 동생 부부와 숲속 식당에 다녀온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저녁 뉴스를 보면서였다. 코로나로 연기된 수능이 12월 3일에 실시된다는 뉴스였는데 화면에 뜬 1 2 3 이란 숫자를 보고 나는 날짜를 외우기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하나 둘 셋, 왈츠, 그런 말이 쓰여 있던 경서의 편지가 생각났다.
스물다섯 살 2월에 집에서 쫓겨 나올 때 나는 짐을 싸면서 책상 위에 쌓여 있던 것들과 서랍속의 것들을 모조리 닥치는 대로 박스에 쓸어 담았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그걸 열어볼 여유가 없었다. 내가 그 박스 안에서 뜯지도 않은 경서의 편지를 발견한 건 아마 소송을 통해 유산을 상속받고 작은 아파트를 사서 이사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편지는 그해 1월 초쯤,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일기 상자를 돌려보내기도 전에 그가 써 보낸 것이었다. 누가 내 책상 위에 던져둔 게 박스에 쓸려 들어갔고 거기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경서의 편지에는 그해 1월 23일 몇시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편지를 읽었을 땐 이미 그로부터 사 년이나 지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1월 23일이라는 날짜를 기억하는 건 경서가 편지에 하나 둘 셋이라고 쓰고 왈츠가 어떻다는 식으로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1 2 3 으로 연결되는 날짜를 왈츠의 박자와 연결 지었을 경서를 생각하고 그때 서른 즈음의 나는 잠시 웃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삼십 년이 더 지난 세월이 흘러 이제 내가 12월 3일이라는 또다른 왈츠의 날을 알아낸 것이다. 1월23일 말고 12월 3일이라는 새로운 왈츠의 날도 있다고, 그러니까 왈츠의 날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셈이라고, 나는 당장 경서에게 편지라도 써 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꽤나 의기양양한 기분이던 나는 갑자기 편지의 어떤 내용을 떠올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휴대전화를 집어들고 양력 음력 변환 프로그램에 들어가 그해 1월 23일을 입력했다. 음력으로 변환하는 버튼을 툭 치고 나서 나는 가만히 숨을 참았다. 음력 12월 3일, 정축월 임술일. 나는 화면을 오랫동안 들여다 보았고 그러자 그가 쓴 편지의 내용이 사진처럼 또렸이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둘이 함께 왈츠의 스텝을 밟는 날.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그날 우리 숲속 식당에 가지. 나는 흰 종이를 꺼내 큼지막하게 1 2 3 이라고 써보았다.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세 숫자는 볼수록 춤을 추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양력과 음력이라는 두 겹의 차원이 1 2 3 이라는 동일한 무늬로 만나,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우주의 왈츠를 추는 날. 내 생애 한 번밖에 없었을 그날에 나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나. 어머니 앞에 엎드려 울며 다시 착한 딸이 되겠다고 빌고 있었나, 끝장을 보자고 대들다 오빠에게 머리를 펀칭볼처럶 두드려 맞고 쓰러져 있었나. 세상은 그날 왜 나를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나. 나는 한참 눈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 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꼬박 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숲속 식당의 마당에 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을 권하듯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 테고 우리는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돌아갈 것이다. 공중에서 거미들이 내려와 왈츠의 리듬에 맞춰 은빛 거미줄을 주렴처럼 드리울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권여선 기억의 왈츠에서.